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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2011 활동

8월 13일 탐방대 길을 나서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9. 3.
유난히도 햇살이 따가운 토욜이다..
햇살이 무서워서였을까 남학생들에 비해 여학생 출석이 저조하다.. (휴가철이고 연휴라 가족 여행을 떠난 친구들이 많았다) 암튼 통통 탐방대원들아~  go!go!


마산 합포구 월영동 만날재를 찾았다.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기진맥진한 애들과 선생님이다.
등산로 계단 그늘에 모여 만날재의 전설과 고개에서 내려다 보이는 돝섬의 전설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만날재 전설
고려 말엽 마산포(馬山浦)에 양반 이씨 가문이 있었는데, 편모슬하에 3남매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어미마저 고질병으로 눕게 되자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한편 감천골에는 금전으로 진사 벼슬을 얻은 윤씨댁이 살고 있었는데 서른 살 쯤 되는 외아들의 혼사를 위하여 사방 곳곳에 혼사처를 구하려고 하였으나 아들이 반신불수에 벙어리였기에 좀처럼 혼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시골로 행상을 다니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양가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아주머니의 권유로 그해 봄 이씨 가문의 큰 딸 처녀와 감천골 윤진사댁 외아들 벙어리와 혼사가 이루어졌다. 
가혹한 시집살이와 자식을 못 가진다는 갖은 구박과 성화를 받으면서도 남친정어머니 병환과 어린 자매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어 시집살이 3년 만에 시부모에게 근행할 것을 요청하였던 바, 벙어리 남편은 아내를 앞세우고 만날고개까지 동행하여 빨리 친정에 다녀오라고 하면서 만날고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진사댁 며느리는 곧장 뜀박질로 친정에 와 보니 시집 갈 때 받은 금전과 전답으로 어머니의 병은 완치되었고, 가세는 호전되어 있어 마음이 한량없이 기뻤다.
그리고 시집살이 사연을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돌아가지 않을 것을 여쭈었더니 호통을 치면서 빨리 시가로 돌아가라고 야단이었다.
그러나 만날고개에서 기다리던 남편은 그 동안에 자신의 열등의식으로 인해 아내에게 "집을 도망쳐 나가 살아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곳에서 남편은 죽은 것이다.
스무살의 청상과부가 되어 수절하면서 애환으로 살아가는데, 몇 해가 지난 팔월달 열이래 날이었다. 친정이 그리워서 안부라도 전해 듣고 싶었다. 만날고개에 가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친정 안부나 전해 듣고 친정집 처마라도 멀리서나마 바라볼 겸 해서  만날고개로 갔다. 그런데 때마침 그날 친정어머니와 여동생이 시집간 딸의 안부를 전해 듣고 싶어 만날고개를 넘나드는 행인들을 만나러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이심전심으로 그렇게도 보고 싶은 친정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게 되어 얼싸 안고 한 많은 정담을 나누었다.

*돝섬 전설
옛날 김해 가락왕의 총애를 받던 한 미희가 어느날 갑작히 사라지자 낙담한 왕은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미희를 찾아 나섰다. 그러자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가 골포(마산의 옛 지명) 앞바다의 조그마한 섬에 세상에서 둘도 없는 절세의 미녀가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보고가 왕에게 들어갔다.
왕의 특사는 미희가 돝섬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을 발견, 환궁하기를 재촉했다. 그러자 미희는 갑자기 금빛 도야지(돼지)로 변해 큰 울음소리와 함께 먹구름 가득찬 두척산(무학산의 옛 이름) 상봉의 큰 바위틈으로 사라져버렸다. 특사의 보고를 들은 왕은 군병을 보내 두척산 바위를 포위하자 미희가 나타나 환궁을 청하는 군병을 향해 금도야지로 변했다.
금도야지가 달려들 기세를 취하자 군병들은 활과 창 등 무기로 금도야지를 내리치자 금도야지는 바위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그순간 이상한 기운이 돝섬쪽으로 뻗더니 이내 사라지고 그 이후 돝섬 근방에는 밤마다 도야지 우는 소리와 함께 괴이한 광채가 일어났다. 세월이 지나 신라의 큰 인물 최치원 선생이 돝섬으로 건너가 제를 올렸는 데 그 이후 이런 현상이 없어졌다고 한다.


마산합포구 교방동에 자리한 관해정은 광해군 때 한강 정구 선생이 정자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라 한다. 후학들은 그를 추모하고자 이곳에 회원서원을 세웠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고 서원의 부속건물이었던 관해정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관해정 앞에는 정구 선생과 허목이 손수 심었다고 전해지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는데. 서원 앞에는 은행나무와 남쪽, 일편단심을 뜻하는 백일홍을 많이 심는다고 한다.


은행나무 아래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선생님 설명을 듣는 아이들이다. 인증샷도 여기서 찰칵~
이젠 미수 허목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떠나기로 했다.

 


미수 허목 선생은 병자호란 직후 경남 의령과 사천을 비롯해 창원에서 십년간 머물면서 달천계곡 너럭바위에 ‘달천동(達川洞)’이라고 새겼다. 마지막 사진은 벼루로 사용한 흔적이다.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문정공미수허선생유적지’ 비석이 있었다. 곁에는 경상대 허권수 교수가 비문을 쓴 유적비도 세워져 있었다. (허목선생의 일가일거라고 하심) 바닥의 거북은 땅을 의미하고, 용은 하늘을, 비석은 우주목을 의미한다고 한다.




달천계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허목은 외감마을 새터에 달천정을 짓고 4년 가량 머물렀다고 한다. 그가 손수 샘을 팠다는 '구천'은 경남도지정 제32호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우물 안에 거북모양의 자연석을 넣어 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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