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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2005-2009 활동

동학농민혁명특강 4강좌와 답사

by 사람의숲 2006. 12. 20.

2006년 12월 14일 도민일보강당에서 2주(화,목 10시30분~12시30분) 진행된 동학농민력명역사특강이 종강되었습니다.
마지막 강좌는 성균관대 배항섭 교수의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나"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역사강좌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주최하고, 경남도민일보, 창원대 경남학센터, 경남정보사회연구소가 힘을 모아 진행한 강좌였습니다.
내년에도 좀더 심화된 내용으로 진행하자는 의견들도 나왔습니다.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530
"전봉준-대원군 밀약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배항섭 교수 "권력쟁취 · 정치개혁 위해 서로 필요" 주장 눈길

 
 2006년 12월 15일 (금)  민병욱 기자  min@idomin.com  
 

"대원군은 정권 장악을 위해 전봉준(동학농민군)이 필요 했고, 전봉준도 자신이 내세운 보국안민을 보다 빨리 이루기 위해 대원군을 필요로 했다."


  14일 오전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열린 ‘시민을 위한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에서 성균관대 배항섭 교수가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유은상 기자 yes@idomin.com  
 
동학농민전쟁 당시뿐 아니라 이전부터 전봉준과 대원군 간에 접촉을 통한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동학농민전쟁과 관련한 자료와 연구가 이어지면서 농민전쟁에 대한 실상과 성격이 또렷해지고 있지만, 전봉준과 대원군 간의 '밀약설'은 아직 명쾌하게 해명되지 않은 과제라는 점에서 더 도드라져 보인다.

배항섭 성균관대 연구교수는 14일 오전 10시 30분 마산 양덕동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열린 '시민을 위한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서 이 같은 얼개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배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1892년 10월 공주집회(교조신원운동)부터 1894년 9월 제2차 동학농민군 봉기에 이르는 과정 속에 대원군과 전봉준(동학)의 관계가 '심상치'않았음을 드러난 자료를 근거로 설명했다.

먼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기 대원군과 접촉했다는 사실에 대해 "1893년 2월 동학교도들의 광화문 복합상소가 일어났을 때 중앙정계와 서울에 주재하던 각 국의 외교관들 사이에서 동학교도의 배후에는 대원군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면서 정교는 <대한계년사>에서 '광화문 복합상소 때에 대원군은 몰래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와서 모이게 하고 반역을 도모해 그의 손자 준용을 추대하려 하였으나 마침내 성사되지 못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대원군 측이 늦어도 교조신원운동 시기부터는 동학교도를 이용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893년 2월 복합상소를 전후한 무렵부터 동학교도들이 정부나 관변, 그리고 민간에 제시하는 글이 그 내용 면에서 종교적 요구가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척왜양이 전면에 등장한 점도 대원군과 일부 교도들 사이의 접촉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는 이러한 사실들이 "정치적 성향 면에서 대원군과 전봉준 사이에 일치되는 면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전봉준이나 농민군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행동이 반란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당시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대원군과 척왜양이라는 주장이 필요했다"고 해석했다.

그는 그럼에도 전봉준과 대원군의 연관문제가 역사학계에서 잘 다뤄지지 않고 있는 까닭에 대해 "해방이후 한국 역사학계의 최대 과제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이었다"면서 "이 때문에 학계가 반제국주의·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전쟁과 당시 수구세력을 대표했던 대원군을 연결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결국에는 밝혀지기 마련"이라며 "전봉준과 대원군 간의 '밀약설'은 농민전쟁의 큰 흐름을 이해하고 농민전쟁의 성격이나 접근방법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12월 16일 동학유적지 답사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657
"경남지역 동학농민혁명, 흔적이 너무 없다"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 마무리 답사...참가자들 "안내판이라도 세워야"
 
 2006년 12월 17일 (일) 19:26:49 민병욱 기자  min@idomin.com  
 
 
"참가자들의 흘러 넘치는 '역사의식'과는 달리 경남 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들은 유적지라 부를 수 없을 만큼 '과거'에 대한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았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주최하고 경남도민일보, 창원대 경남학연구센터가 공동 주관한 '시민을 위한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이 지난 16일 진주·하동 일대 관련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16일 오전 진주성 북장대에서 김준형 교수가 경남 서부지역 동학군 대집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주완 기자  
 
유적지 답사에는 20여 명이 참여했으며 역사특강 제3강에서 강연자로 나온 김준형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가 길잡이와 해설을 맡았다. 

답사팀은 이날 오전 9시 마산역을 출발해 진주성(경남 서부지역 동학군의 대집회에 설명)을 시작으로 진주 남강댐(광탄진에서의 초기 집회), 덕산(1862년 진주농민항쟁 첫 봉기지), 고승당산, 내대리(동학도의 소굴, 진주영장 박희방의 토벌전), 하동공원 전망대(경남 서부지역에서 동학군과 일본군의 첫 전투) 등 경남 서부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를 훑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적지는 댐을 만들 때 물에 잠기거나 조그마한 팻말 하나 조차 없이 방치돼 있었다. 그야말로 '어디가 어딘지'전혀 알 수 없었다. 답사를 가는 까닭인 현장에서 눈으로 확인하는 '맛'이 떨어졌다.
전적으로 인솔자인 김준형 교수의 입과 손짓, 그리고 그가 가지고 온 옛 지도가 유일하게 당시상황을 설명해주는 '중간다리'였다.
그나마 흔적이라고는 기껏 천교도당이 고승당산에 세운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전부였고, 진주 나동면 내평리 전주 이씨 재각 옆 터에 들어설 진주농민항쟁기념탑 터 정도만 버스로 지나치며 볼 수 있었다.
그런데다가 답사팀을 태운 버스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인 1862년의 진주농민항쟁의 첫 봉기지 옛 수곡장이 섰던 덕천강변(진주 수곡면에서 하동 옥종면을 넘어가는 다리)에 이르자 김 교수가"일전에 답사를 다녀온 전교조 교사들이 표지판을 세웠는데,      
 
촉석루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주완 기자
진주시가 거추장스럽다며 '알아서'없앴다"고 하자
'어휴'하는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지난 12일 있었던 강연에서 김준형 교수가 "도내 곳곳에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유적지가 널려 있다. 그런데 안내판 하나 없다. 때문에 답사 때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다. 경남도를 비롯한 해당 자치단체가 이런 곳에 작은 표지판이라도 달아주면 혁명의 의미가 더 잘 드러날 것"이라는 말을 왜 했는지 실감났다. 
고승당산 '동학혁명군 기념탑'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주완 기자  
 
답사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책이나 강의로만 들었던 내용을 직접 둘러 불 수 있어 좋았지만, 경남지역 동학농민군들의 치열했던 투쟁의 흔적들이 이렇게 남아 있지 않은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김준형 교수도 "재미있게 설명을 못해 미안하다. 위령탑을 빼고는 남아있는 게 없어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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