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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생긴일

[경남도민일보] 길 위의 인문학 소개 기사 - [아침을 열며] 마을이 사랑한 책

by 사람의숲 2024. 8. 19.

 

 

[아침을 열며] 마을이 사랑한 책

"그냥 슬리퍼 신고 반바지 차림으로 도서관에 가는 거지. 마치 책이랑 놀 것처럼 말이야."벌써 30년 전이다. 오랜만에 찾아뵌 제자에게 대학교 은사님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건넨 말이다.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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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마을이 사랑한 책

  • 기자명 김혜란 방송인·강사  

특별한 경험이 되는 '한 마을 한 책 읽기'
다양한 생각 나누며 우리사회 피가 되는

"그냥 슬리퍼 신고 반바지 차림으로 도서관에 가는 거지. 마치 책이랑 놀 것처럼 말이야."

벌써 30년 전이다. 오랜만에 찾아뵌 제자에게 대학교 은사님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건넨 말이다. 전공과는 다른 직종에서 일하며 지쳐가던 제자는 은사님의 맑고 깊은 눈빛으로 전한 말을 그 후로도 오랫동안 기억했다. 창원에서 시작한 경남정보사회연구소의 마을도서관 이야기다. 낯설지만 편안한 그 개념이 마음에 박혔다.

2006년 시작된 한 마을 한 책 읽기 사업은 특히 재미가 남달랐다. 한 책을 할머니 할아버지에 엄마 아빠, 손자 손녀까지, 마을 사람들이 두루 읽고 이야기하고 감동도 느껴보는 일이었다. 책으로 하나 되는 마을이랄까.

다양한 욕구와 개성을 가진 마을 사람들이 정해진 책 한 권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할지 흥미로웠다. 책들은 다양하게 선정됐다. 청소년소설도 있고 자기계발서, 동화, 그림책, 환경 관련, 만화책도 있었다. 그런 책들을 마을 사람이 함께 읽고 사랑하기를 벌써 20여 년째다. 운영방법도 달라지고 작은도서관에 대해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치도 달라지고 있지만 여전히 '한 마을 한 책 읽기'는 이어지고 있다.

언젠가 엄마 치마에 매달려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고사리손으로 책장을 넘겼던 아이가 청년이 되어 기억 속 그 책을 찾는다. '평생교육이든 도서관이든 하나만 하라'며 눈에 힘을 주던 혈기왕성한 아저씨도 백발이 성성해진 채 여전히 슬리퍼에 반바지 바람으로 도서관에 들어선다. 너무 많이 파손돼서 처분한 책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으니 '한 마을 한 책 읽기' 했던 책은 어디 있느냐면서 구석진 곳 책장을 주억거린다.

경남정보사회연구소와 함께하는 작은도서관이자 평생교육기관인 봉곡평생학습센터에서는 올해에도 크고 작은 프로그램들이 돌아가고 있다. 그중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도 있는데, '한마을 한 책 읽기, 다시 읽기'다. '마을이 사랑한 책'이란 새 제목을 달고 한 마을 한 책 읽기에 선정되었던 책을 마음 돌봄과 영화로 엮어서 강연과 탐방으로 다시 읽어나갔다. 박장대소도 하고 가슴도 쓸어내리면서 마을 사람들은 생각과 마음을 표현했다. '이제 생각하기가 싫다'던 육십이 넘은 청춘(?)들은 그 시절 책에 빠져들었고 생각이란 것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이런 기분이 처음이라고 했다. 가족이란 주제의 책들과 관련 있는 영화들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 읽고 보며 다양한 생각을 하는 경험이 특별하다고 했다.

할 일 많은 세상이다. 날마다 새로운 것들이 넘쳐난다. 그런 중에 한마을 사람들이 함께 읽은 책을 다시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특별하다. 시절을 추억하거나 아쉬움을 채우는 이상의 행위다. 익숙한 기반 위에서 새로운 사고의 지평이 전방위로 펼쳐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독서인구가 줄어든다는 걱정을 수십 년째 듣는다. 작은도서관들이 없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커다랗게 몸집을 불린 도서관과 통계에 잡히는 독서율만이 전부인 세상은 아니다. 손바닥만 한 도서관이어도 여전히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고 있다. 우리 사회의 실핏줄로 건강한 정신의 피돌기를 통해 싱싱한 붉은 피를 공급하고 있다.

살인적인 여름이 가고 있다. 30년을 이어온 작은도서관으로 어서 가자. 여전히 마을이 사랑하는 책들의 수혈 한번 받아 보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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