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료실/2012활동

어른들의 작고 따뜻한 놀이터, 거창 가조장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2. 24.

어른들의 작고 따뜻한 놀이터, 거창 가조장


차혜정(구석구석장터취재원)


가을이 저만치 뒷모습을 보이며 제 갈 길을 재촉하는 날에 거창 가조장을 둘러보러 나선다. 얼마 전 거창 가조온천이 참 좋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어 가조장 탐방은 은근한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창원에서 출발하여 1시간 30여분을 달려가자 기품 있는 거창의 산들이 우리를 반긴다. 길을 나서길 참 잘했구나 싶다.

드디어 가조면에 들어선다. ‘아! 이곳이구나!’ 마음이 먼저 환해진다. ‘잘 왔다. 어서 와라.’ 살포시 안아주는 느낌이다. 가조면을 둘러싼 산들은 든든한 아버지 같고, 그 가운데 햇살이 따사로이 내려앉는 들판은 엄마 같다. 마음이 헛헛하고 외로울 때 찾아오면 큰 위로가 될 것 같은 곳이다. 첫인상이 남다르니 장터에 대한 기대도 어느 때보다 커진다.

장터 입구로 들어서니 우리 일행을 뭐하는 사람들인가 하고 궁금해 하는 표정들이 역력하다. 가만히 지켜보면서도 경계의 눈빛은 없다. 잠시 둘러봐도 시장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뭔가 오순도순 지내는 듯한 모습이 편안하고 따뜻한 곳이구나 싶다. 가조면의 첫인상과 가조장의 분위기가 다르지 않다.

시장을 둘러보니 김장배추를 절이고 있는 풍경, 무말랭이와 시래기가 말라가는 모습이 시장이라기보다는 어느 시골집 안마당에 온 느낌이다. 깨끗한 무말랭이를 보며 관심을 보이자 선뜻 “먹어봐라.”하시며 한 줌 내미신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웃으시며 얘기를 잘도 해주신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니 재미있는 풍경이 많다. 자그마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곳에 파는 물건도 비슷비슷한데 가게마다 어르신들이 이불 한 장 같이 덮으시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가 한창이다. 가게 입구에는 장 보따리 여러 개가 누가 가져가도 상관없는 듯이 여러 짝의 신발과 함께 덩그러니 놓여있다. 작은 가게 맞은 편 길가엔 마른 어물을 파시는 할아버지가 늦가을 햇살을 받으며 하염없이 졸고 계신다.



 가조장의 따뜻한 느낌이 좋아 지났던 길 또 지나가며 작고 좁은 장터를 이리저리 계속 돌아다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어물전에 오셨다.

“저 피디(마른 문어) 한 마리 얼마고?”

“오천원예. 어디 쓰실라고예?”

“내가 심심해서 묵을라고. 저거 도라.”

또 시장 모퉁이에는 물건을 파시는 분이랑 사시는 분이 서로 아는 분인 모양이다.

“무우가 필요한데...”

“이거 가져가이소. 한 개 더 넣어가이소.”

“무거바서 내가 못들고 간다.”

“아이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는 사람인데 하나 더 가져가이소.” 한다.

무를 파시는 분도 무를 사가는 분도 머리가 하얗다. 할머니 두 분의 정겨운 실랑이가 보기 좋아 빙그레 웃음이 절로 난다. 할머니 두 분을 지나쳐 옷을 파시는 아주머니 가게 앞에 서서 옷 구경을 하다가 난로에 구워진 고구마를 힐긋 쳐다보니 “먹어봐라.”하시며 하나를 건네주신다. 조금 전에 지나치며 그 군고구마 참 맛있겠다 생각했었는데 그 맘을 들키고 말았다.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에서 보기 힘든 따뜻하고 평화로운 풍경들이 가조장에는 많다.


시장을 돌며 따뜻하고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점심을 먹기 위해 무말랭이를 주시던 아주머니 가게로 갔다. 좁은 가게 안으로 들어서 먼저 앉아있는 사람들의 상을 보니 푸른 배추와 여러 가지 반찬들이 맛깔스러워 보인다.

“여기 밥은 뭐가 됩니꺼?” 하고 물어보니

“우리 집에는 밥 안한다.”

“예?”

“우리 집에는 묵만 한다. 저거는 우리 점심 먹을라고 준비한기다.” 하신다.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서나와 옆집으로 간다.

“여기는 밥 합니꺼?”

“밥은 안한다.”

“그럼 뭐 하는데예?”

“우리집은 국수.”

“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집 모두 억지로 손님을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먹고 싶으면 와서 먹고 아니면 다른 곳에 가서 먹으라는 요즘 말로 쿨한 분위기다.

거창 가조장은 여느 시골장이 그러하듯 젊은 사람들은 보기 힘들고 그럭저럭 비슷비슷하게 나이 들어가는 어르신들만 찾고 있지만 ‘어른들의 놀이터’ 같다. 거창 가조장은 심심해서 놀러나와 보는 곳, 장터 구석구석에 모여서 흘러가는 시간을 이야기 하는 곳, 물건을 팔러 나온 건지 세월을 팔러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곳, 어른들이 놀다가는 작고 따뜻한 곳이다. 그곳에는 인간의 욕망보다는 평화로움과 따뜻한 정이 머물러 있고,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