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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김봉우, 2006, 경남의 옛길, 옛길의 문화: 조선 후기 역로를 중심으로 (집문당)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2. 10.
지난 일요일에 최헌섭 박사님의 안내로 김해 적항역에서 진해(웅천) 보평역으로 넘어가는 길을 따라 나섰다. 
지금으로 치면 국도에 해당하는 길일 터인데, 그대지 넓지는 않다.  아마도 길이 가파르고 해서, 그저 봇짐을 지고 걸었거나, 맨몸으로 다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 역이 있으면, 일단 말을 기르고 있었으므로, 말을 사용하여, 전령을 보내든지, 아니면, 조랑말을 사용하여 물품을 날랐을 것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넓은 길이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볼수도 있을 것이다.  정기시장을 떠돌던 장사꾼들이 이 길을 걸었을 가능성도 높다.

복원중이 웅천읍성, 제대로 된 복원이 아니라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다.


우리가 간 길을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다닌 글이 위의 책에 쓰여 있다. 
웅천현의 보평역에서 김해의 적항역으로 넘어가는 길을 기록하였다.  보평역은 크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웅천읍성의 부근에 보평역이 위치하는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단 관리들이 근무하고 있었고, 국가의 문서수발, 연락, 관리들의 행차들이 있었기에 길이 발달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 역에는 역리가 30명, 여자종이 5명, 중간 말이 2마리, 짐을 싣는 말이 4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의 규모는 조선시대 후기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적은 셈이지만, 그래도 이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역사, 이들을 전답과 주택, 말을 기르기 위한 시설과 목초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너더리 고개를 넘어 웅천현으로 향하는 길, 너더리 고개를 넘어서자 얼마되지 않아 군부대가 길을 막았다.


일요일에 군부대를 만나 돌아가느라고 고생한 길 외에 다른 길로는 이미 최헌섭 박사님이 소개하신 두동의 안평마을이 있다고 한다. 
건너편의 너더리 마을은 지금은 부산 지사동으로 공장들이 많이 있었고, 부산의 강서구에서 나오신 산불감시하시는 분이 계셨지만, 원래 이자리에는 고개를 넘기 전의 주막이 들어서고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공장옆의 개들을 많이 기르던 곳 위편의 밤내고개이다. 
밤내 고개 위의 성황당에 있던 돌무더기를 최헌섭 박사님이 설명하시면서, 실제로 이 돌은 유사시에 적을 공격하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이 책(307쪽)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밤내 고개는 중종때 왜인들이 웅천성을 포위했을 때 김해부사 성수재가 석전군(돌팔매질을 잘하는군사)을 이끌고 율천현과 너더리를 넘어 웅천성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성황당의 돌들, 우리가 밤내고개를 넘으면서 본 돌들이 실제르 전투에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있다. 
김해 적항역도 중간말이 2마리, 짐을 싣는 말이 4마리가 있었다고 하니, 웅천현의 보평역과 비슷한 규모였던 것 같다.  적항역 근처에는 최헌섭 박사님이 설명하셨듯이, 관동마을이 있었고, 이것은 적항역의 역관들이 살던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너더리 고개 서낭당 돌무더기에 대해 최헌섭 박사가 설명하고 있다. 2010.2.7



우리가 가지는 않았지만, 진해 웅천현의 보평역에서 안민고개를 거쳐 창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309쪽에 보니, "안민고개를 오르는 길은 석동 뒤편으로 하여 산자락을 타고 비스듬히 오른다.  지금의 진해시 석동 정수장 뒤편이다.  얼마를 오르다 보면 웅천 현감을 지낸 이시휘와 이지학의 청덕표를 만나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행했던 한분이 지적했던 정수장을 의미하는 곳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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