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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2005-2009 활동

시민을 위한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 개강

by 사람의숲 2006. 12. 6.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주최하고, 경남도민일보와 창원대 경남학연구센터가 주관하며, 경남정보사회연구소와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후원하는 "시민을 위한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 개강식과 1강좌가 12월 5일(화) 경남도민일보강당에서 진행되었습니다.
 
# 창원대 남재우(사학과) 교수의 사회로 개강식을 가졌습니다.


# 경남도민일보 허정도 대표이사님의 인사말..  

# 신영우 충북대 교수님의 인사말과 이어 "동학과 농민혁명이 만나다"라는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오전 10시 30분에 진행되는 강의라 준비하는 측도, 참여하시는 분들도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까라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동학농민군들의 이루지 못한 참세상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 분들이 많아 좋은 분위기에서 개강식과 1강좌를 진행 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2강좌는 12월7일(목) 오전11시 '동학농민혁명은 왜 일어났는가?"라는 주제로 이이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서원대 석좌교수)님을 모시고 진행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합니다. 
 

경남도민일보 기사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677
 
동학농민혁명, 최대 피해지는 경상도 
신영우 교수,'시민을 위한 특강'서 주장..."전국화 못된 건 '엉터리 국정교과서'때문"
 
 2006년 12월 06일 (수)  민병욱 기자  min@idomin.com  
 

 제국주의에 맞선 전국적인 항쟁, 낡은 봉건체제를 뒤흔들었던 동학농민혁명이 온전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경남지역은 2차 봉기 초기에 가장 큰 피해를 봤음에도 이러한 사실들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주최하는 '시민을 위한 동학농민혁명 역사 특강'이 5일과 7일, 12일과 14일 4차례에 걸쳐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열린다. 이어 16일에는 진주와 하동지역 혁명유적지 답사가 있다. 5일 오전 신영우 충북대 교수가 '동학과 농민혁명이 만나다'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   


신영우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5일 오전 10시 30분 마산 양덕동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열린 '시민을 위한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 동학! 농민혁명과 만나다'에서 이 같이 설명했다.

신영우 교수는 "동학농민혁명이 전라도 뿐만 아니라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곳곳에서 벌어졌는데도, 우리의 머릿속 상상은 전라도 고부지역 따위로만 머문다"면서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계층만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해서 전개된 것이 아니라 거의 전국에 걸쳐 다양한 사람들이 봉기해서 펼쳐진 사건"이었음을 강조했다.

신 교수는 이에 대한 근거 가운데 하나로 "전라도에서 활동한 동학농민군 중에도 전라도 출신보다는 전국 각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동학농민혁명을 이끌다 붙잡힌 전봉준 장군의 진술자료인 '전봉준공초'를 들었다.

그는 따라서 "전라도에 한정해서 동학농민혁명의 지역성을 강조한다거나 혁명의 발상지와 첫 기포지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일부만 내세워서 전체를 덮어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고 꼬집었다.

신 교수는 동학농민혁명이 '전국화'되지 못한 원인으로 전라도에서 시작해 전라도에서 끝난 것으로 서술한 엉터리 국정교과서와 '게으른 연구자'들을 지목했다.

같은 연장선에서 신 교수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초기인 1894년 8∼9월 경상도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봤다. 특히 하동은 읍내가 완전 전소됐으며, 성주지역은 가옥 1000채가 일시에 불이나 3일 동안 연기가 100여 리에 퍼졌고, 타지 않은 것은 관청 뿐일 만큼 피해를 입었는데도 이러한 사실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밖에 "동학농민혁명을 동학의 시각만을 강조하거나 농민전쟁론, 혹은 이 두 가지 시각을 절충해서는 전체를 온전히 볼 수 없다"며 "동학농민혁명으로 보는 게 이상적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한편 역사특강은 7일 오전 11시 이이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서원대 석좌교수)의 '동학농민혁명은 왜 일어났는가?'로 이어진다. 
  

[3.15광장]동학농민혁명과 한미 FTA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637 

2006년 12월 06일 (수)  경남도민일보  webmaster@idomin.com  
 
5일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은 조상 대대로 경상도에 기반으로 살아왔던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지금껏 학교 교육에서 배웠던 대로라면 동학혁명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종의 '민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 강의를 맡은 충북대 신영우 교수는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경상도 상주·예천·안동 등지를 현장답사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확인했다고도 했다.

신 교수는 1894년 충청도 직산에서 활동한 동학농민군 박용석의 사례를 들어 동학농민혁명을 설명했다. 박용석은 양반집 서자로 태어났는데 집안에서 차별을 받은 것에 분개해 집을 뛰쳐나갔으며 직산에서 광부로 일을 하던 중 동학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자로 차별을 받았던 그에게 신분과 남녀, 그리고 노소의 차별을 부정하고 모두 평등하다고 가르치는 동학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농민전쟁이 한창이던 때 집을 나가서는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둘이랴. 그런데 지금껏 참여자로 확인된 사람은 280여 명, 유족도 겨우 780여 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아마도 신 교수의 설명대로 동학을 한 사람은 반란군으로 치부된 채 100년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리라. 진작 '동학란'이 '동학혁명'이었다면 어찌 당시 동학농민군에 가담했던 사람이 이정도 밖에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예부터 반란군은 삼족을 멸하는 형을 받았기에 부모가 동학 가까이에만 갔더라도 들킬까봐 쉬쉬하고 관군만 봐도 덜덜 떨었을 것이다.

신 교수는 지금도 인터뷰를 할 때면 자신을 해하려 온 사람은 아닐까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드러내기 자랑스러운 세월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워낙 많은 고초를 겪었기에 선뜻 조상의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도 많으리라. 또한 감추어야 했던 가족의 과거사였기에 전승되지 못한 것도 많으리라 짐작한다.

역사는 똑 같지는 않아도 유사한 형태로 반복한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나는 이날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요즘 일어나고 있는 '한미FTA반대 범국민 투쟁'을 떠올렸다.

110여년 전 농민들은 왜 들고 일어났는가를 알면 오늘날의 한미FTA 반대 투쟁에 농민들이 대거 참여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는 조세수탈, 가혹한 착취에 평등치 못한 사회구조가 원인이었는데 지금은 정부가 수출산업에 집착한 나머지 농업을 너무 등한시 한 데 기인하지 않나 여긴다. 돈이 안 되어도 평생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온 농민들에게 더 이상 농업을 지을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버린다면 굶어 죽으라는 말인데 꿈틀거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집회 참석해 성난 농심을 분출했다가 몇몇은 벌써 '범죄자' 혐의를 덮어쓰고 경찰서를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이미 세상이 많이 변했기에 그런 '범죄자' 부모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할 자손은 없을 것이라 여기지만 '동학란'이 아닌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를 배우면서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위정자들의 태도에서 한없는 실망감을 느낀다.

/정승환(창원시 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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